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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가 마비되어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그 노인의 인생은 보기좋게 내리막길을 따라 굴러떨어졌다. 35살의 콜튼은 실적이 애매한 행정 관료였다. 그 시기 뉴 커먼웰스 엔클레이브는 보호구역의 인구 증가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리해고와 같은 원리로 자격이 의심스러운 사람부터 목이 잘렸다. ID칩을 회수당한 콜튼은 얼마 없는 짐을 싸서 6평짜리 방을 비워야 했다. 정신차리니 그는 생존시민이 되어 있었다. 새 직장은 합성 단백질 식량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14시간동안 끓는 물에서 응고된 단백질을 건져냈다. 삶에 대한 특기할 사항 없이 18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콜튼은 더 이상 옛날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찾아오면 그는 신문지를 뒤적이며 ‘미국’이라는 단어를 찾는다. 국가는 노쇠해가는 그의 또 다른 몸, 영원히 건강하고 단단하며 남들을 정복할 수 있는 몸이다. 동시에 적당한 화제거리이기도 하다. 서로를 향한 관심은 옅어도 나라의 미래에 관해 의견을 나눌 준비는 되어있는 외로운 직원 몇 명이 콜튼의 근처에 모여 앉는다. 그건 하루 중에 가장 괜찮은 시간이다. 삶은 이대로 영영 똑같이 흐를 듯 하다. 신체의 노화를 잊고있는 동안은 말이다.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내려오려던 콜튼은 근무 시간이면 저려오던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비밀결사대나 노동조합 같은 반사회적 모임은 그와 무관한 일이고, 공장이 해고를 결정했을 때 콜튼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나쁜 사건은 한꺼번에 일어난다. 장애인이 되는 일. 생존시민에서 경계시민으로 굴러떨어지는 일. 그리고….

  거긴 경계지대의 주민들에게 ‘의료동’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그 건물의 전신前身은 병원조차 아니었다. 다 무너져가는 모텔을 개조해 사람을 눕혔을 뿐이다. 전봇대 옆에는 빛을 잃은 싸구려 네온 전광판이 걸려있었다. 사람들이 의료 시설은 눈에 띌 수록 좋다고 했지만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53세의 콜튼은 죽은 듯 잠든 방사선 오염자들과 뒤엉켜 누워있다. 그는 이제 노동력조차 되지 못한다. 식량과 자원을 좀먹으며 어떤 윤리적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그저 살려지고 있을 뿐이다. 어두운 천장을 보며 콜튼은 생각한다. 삶은 완전히 실패했다. 또는, 이건 삶이 아니다. 이제 콜튼이 진심으로 원하는 건 고장나지 않은 권총과 탄환뿐이다.

  

  의료동에서 일하는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콜튼의 상태를 보러 가장 자주 와주는 것은 키가 큰 흑인 남자다. 첫 만남부터 콜튼은 미국적 전통에 따라 그를 속으로 니거라고 불렀다. 니거는 최대한 깨끗한 헝겊으로 콜튼의 이마와 목을 닦아주고 욕창이 생기지 않게끔 자세를 고쳐준다. ​9월이 끝나가던 그 날 밤, 다른 환자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 운 좋게 마약성 진통제를 훔쳐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콜튼은 받은 약을 먹지 않고 숨겨두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문병을 가장해 찾아오는 잡상인은 값을 나쁘지 않게 쳐준다. 그에겐 이런 식으로 남몰래 벌어둔 돈이 있다. 헝겊을 가까이 대려는 손을 제지한 콜튼은 개켜둔 옷의 안쪽 주머니를 뒤진다. 제법 두툼해진 지폐더미가 흑인 남자에게 건네어진다. ‘권총을 구해줘요. 남는 돈은 당신이 가지고. 그 다음엔 어디든 상관 없으니까 날 밖으로 옮겨줘요.’​ 자진해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 상대는 순진해보였고, 콜튼은 그가 겁먹거나 순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콜튼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입보다는 오히려 손이 먼저 부드럽게 움직인다. 주름진 이마에 밴 땀을 조심스레 그리고 꼼꼼이 닦아낸 후에야 남자는 신중하게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답했다. ‘데이빗 씨, 차례를 꽤 오래 기다리셔야 될 거예요.’ 아마 그건 농담일 것이다. 조용히 잠든 사람들의 고단한 숨소리가 어둠 위로 도드라진다. 제발 진통제를 가져다달라고, 아니라면 이제 그만 날 놔달라고 아이처럼 매일 보채던 사람들. ‘그동안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가져다 드릴게요.’


  흑인 남자에겐 긴 이름이 있었지만 애칭은 짧고 알기 쉬웠다. 벤. 벤의 나이는 마흔 다섯 살로 콜튼보다 여덟 살 어렸다. 몇 살에 만났든 콜튼의 성기가 그를 상대로 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젖은 헝겊을 쥔 벤의 손길은 일관되게 부드러웠다. 이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가죽처럼 질겨보이는 손끝은 감촉이 맨들맨들했다. 간호 외의 의도로 피부를 만져올 땐 의외로 손길에 힘이 실린다. 입술은 마르고 거칠지만 두께가 있어 푹신했다. 8년 후 벤은 강도를 만났고 녹슨 날붙이에 찔려 죽었다. 함께 도착할 예정이었던 붕대와 소독약도 증발했다. 모두 슬퍼했지만 콜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그와 벤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콜튼은 이미 경계시민이자 장애인이다. 거기에 더해 ‘니거와 사귀는 호모 새끼’까지 되고 싶진 않았다. 다음으로 의료동에 찾아온 여자는 조용하지만 차분한 눈을 하고 있었다. 콜튼은 그녀를 매수하지 못하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살려놓는 대로 살아있는 채 몸은 늙어간다. 여든 살이 될 때까지도 콜튼의 손에 권총을 쥐여준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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