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자 둘이 한 집에 산다는 건 이런 일이다. 샤워가 조금만 길어지면 밖에 있는 녀석이 욕실 문을 발로 쿵 찬다. “씨,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한 발 빼는 중이죠?” 그럼 샴푸 거품이 눈에 들어가 따가운 와중에도 “이런 씨발… 내가 뭐 한 시간째 전세 냈냐? 아니라고!” 하고 소리질러야 한다. 아침은 한 달째 피넛젤리 토스트와 우유 한잔. 꼴통 같은 토스터기는 늘 식빵 왼쪽 모서리를 까맣게 태운다. 그리고 이게 진짜 최악인데,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2시가 되면 동거인, 콜튼 데이빗 그 자식이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낸다. 그리고 거실 TV로 성인 방송을 보기 시작한다. 헐떡이는 여자의 숨소리는 침실에서 베개로 귀를 막은 켈시 듀이의 귀에까지 닿는다.
새벽 2시 23분. 결국 켈시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거실로 나간다.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TV에 사로잡혀 있다. 까만 원피스를 쇄골까지 걷어올린 금발의 여자는 침대 위에서 땀 흘리고 신음하는 동안 진짜로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부드럽고 탄력있게 흔들거리는 가슴, 1인칭을 상상시키는 절묘한 앵글. 콜튼이 꼬박꼬박 챙겨보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상상력이 아무리 빈약한 남자라도 그 여자의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장면을 어렵잖게 그릴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남자 둘이 나란히 앉아 즐기기엔 애로사항이 있다. 켈시가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난 먼저 잔다. 적당히 즐겨.” 당연히 이건 켈시가 양보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콜튼은 남 엿먹이는 일 하나에서만은 끈질기다. “하하! 섰죠?” “…아니거든?” “와, 아까 무조건 뺀 줄 알았는데.” “야, 너 진짜… 아오, 한 대 맞고 싶냐?” 켈시가 진심으로 짜증을 담아 대꾸해도 소용 없다. 콜튼은 묘하게 졸려보이고 말끝은 어눌하게 뭉개졌다. 누가 봐도 취한 사람이다. “굳이 숨길 건 또 뭐예요? 와봐요, 이쪽으로.” “싫어, 인마. 그리고 너, 술 좀 그만….” “내가 해줄 수도 있는데.”
켈시가 짧게 멈춘다. 젠장, 남자들이란. 그는 콜튼의 표정을 본다. 콜튼이 능청스럽게 덧붙인다. “뭐, 당신이 게이만 아니라면요.” 그는 게이라는 말을 '바퀴벌레'나 '지네'처럼 발음한다. 켈시의 경직은 금방 풀린다. 켈시가 팔을 뻗은 순간 콜튼이 멈칫하지만, 나간 손은 콜튼의 얼굴을 갈기는 대신 옆에 있던 리모콘을 집어든다. 삑. TV가 꺼지고 화면 속 나체의 여자가 사라진다. “좀, 가서 잠이나 처 자라.”
다음날 아침. 피넛젤리 토스트를 입에 넣으면서 켈시는 아직도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결국 그는 잠을 설쳤고 지금부터 정비소에 가서 졸린 눈을 꽉꽉 눌러가며 힘껏 나사를 조여야 한다. “야. 다음부턴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런 소리?” “어제 밤에 네가 지껄인 거.” 켈시의 불평을 들으며 콜튼도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문다. 그 녀석이라고 별로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는다. 다닌다는 대학의 기말 고사가 망한 건지, 아빠랑 사이가 더 나빠지기라도 한 건지, 술이 늘어났고 아침마다 두통에 시달린다. 그래도 재수 없는 성격 하나만은 변함없다. 창백한 안색으로도 콜튼이 오른손으로 뭔가 쥐고 흔드는 제스쳐를 보여준다. “이거 말이에요?” 아침 식탁에서 비위 상하는 동작에 켈시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린다. “그래, 그거 새꺄.” “농담 갖고 심각하게 구네.” 콜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꾸한다. 켈시는 우유를 세 모금 쭉 들이키고 이렇게 말한다. “아, 그래. 내가 진짜 게이면 어쩔 건데?”
거기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콜튼은 멍청하게 켈시를 쳐다보고 있다. 결국 이런 녀석들에게 듣는 약은 정해져있는 법이다. 빈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켈시가 콜튼의 어깨를 힘있게 손바닥으로 턱 짚는다. “반 년은 이 집 못 나가는 거 알지? 잘 때 조심하라고.” 달그락 달그락, 쏴아아 하는 물 소리. 켈시 듀이는 겉모습에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보다 한참 성실하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설거지를 한다. 뭐, 으름장을 놨다고 그가 실제로 무슨 짓을 하는 건 아니다. 켈시는 금방 차량 정비소로 일을 하러 나간다. 오클라호마의 여름은 뜨겁고 선풍기 하나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정비소는 기름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 곳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나면 켈시는 기진맥진해있고, 대부분의 날에 콜튼보다 먼저 2층짜리 침대의 1층에 몸을 구겨넣고 곯아 떨어진다.
거실 소파는 2인용이지만 그게 꼭 둘이 앉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파트와 함께 넘겨받은 소파의 첫 주인은 혼자 살았거나 더럽게 사이 좋은 커플이었을 것이다. 켈시 듀이와 콜튼 데이빗이 그렇게 애틋한 사이는 아니고, 보통 한쪽이 먼저 소파를 차지하고 남은 한쪽은 바닥에 앉거나 소파 옆에 불량하게 서서 등받이에 팔을 걸친다. 다시 금요일에서 토요일 사이,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는 시각이다. 오늘은 콜튼이 소파에 앉아있고 켈시가 바닥으로 밀려났다. 아직까지는 광고들이 화면을 채우며 남자들을 애태우고 있다.
“지난번에 한 말 거짓말이죠?” 콜튼이 맥주를 홀짝이며 묻는다. 켈시는 잠깐 후에 그게 ‘게이’ 얘기란 걸 눈치챈다. “왜. 그렇다고 해줬으면 좋겠어?” “그야, 여자 보고 섰잖아요.” “안 섰다고, 씨. 근데 어쩌냐. 난 예쁘면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웃기시네. 방금 지어냈죠?” “하. 진짠데? 어쨌든 게이는 아니지.” 켈시가 입을 비죽이며 웃는다. “그럼 넌 나한테 ‘약속한 거’ 해줘야 될 텐데. 마음의 준비는 해놨고?” 당연히 그렇게 말할 때 켈시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로 한 번 해보라고. 그건 콜튼이 싫어하는 종류의 반격이고 대부분 경우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그의 동거인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너무 높은 걸지도 모른다. 콜튼은 그 멍청한 장난에 어울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씩 웃는다. “’준비‘가 필요한 일도 아니죠. 또 해달라고 조르지나 말아요.” TV에선 이제 막 남녀가 그럴듯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서로의 몸을 훑는 중이다. 콜튼이 소파에서 내려와 켈시 옆에 앉는다. 맥주캔을 바닥에 놓을 때 그 녀석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그걸 눈치챈 순간 켈시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결국 켈시가 바지 버클을 푼 이유의 반은 호기심이었고 반은 이상한 기분 때문이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 금요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난 사고, 멍청한 장난, 나중에 콜튼이 쓰게 된 표현을 빌리자면 ‘게이짓’. 그것도 아니면 젊은 남자들의 사랑 같은 게.
2
몇 번의 금요일이 지나간다. 중간부터 요일이나 TV에서 무슨 화면이 나오는진 크게 상관 없어진다. 서로의 몸에 손댈 수 있는 남자들이 함께 지낸다는 건 부모 없이 게임기와 땅콩버터 잼만 놓여있는 집에 사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샌가 그들은 서로를 ‘듀이’와 ‘데이빗’이 아니라 ‘켈시’와 ‘콜튼’으로 부르고 있다. 어느 주말 켈시는 저번 목요일에 밤 늦게까지 일한 대가로 추가 수당을 받고, 고민 끝에 두 사람이 예산 문제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꽤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콜튼에게 저녁을 사주려고 한다. “…그래서, 시간 돼?” 그 질문이 꼭 생애 첫 데이트 신청이라도 되는 것처럼 켈시는 멋쩍게 뒷목을 문지른다. 콜튼은 처음엔 약간 놀란 듯 보이고, 다음 순간엔 화가 난 것처럼도 보인다. 눈썹이 슬쩍 올라가고 입가에 익숙한 비웃음이 걸린다. “아, 이젠 아예 ‘남자친구’처럼 구시겠다?”
처음에 켈시는 ‘그럼 씨발, 그게 아니면 뭔데?’라고 항의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다다음 주에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을 땐 정확히 그 말을 꺼낸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날 그들은 첫 번째 이별을─콜튼의 주장에 의하면 사귄 적도 없이─겪었다. 같은 일을 세 번쯤 겪은 후에야 켈시는 요령을 알게 된다. “허. 저녁 한 번 갖고 예민해진 게 누군데? 빨리 옷이나 입고 와.” 그렇게 말하고 스테이크집으로 끌고 가버리면 어떻게든 저녁을 먹는 데 성공한다. 그들의 데이트는 매번 그런 식으로 위태롭다. 돌려말할 필요 없이 그들의 관계 자체가 그런 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 한 번은─켈시가 기억하기론 여섯 번째 결별의 직전이다─콜튼이 이렇게 지껄인 적도 있었다. ‘여자친구랑 살기로 했어요.’ 그럴 때 그가 켈시한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죠.’ 또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당신은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시간 돼?’ 그 한 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켈시 듀이가 한 생각들, 미치도록 길고 끈질겼던 고민들을 콜튼 데이빗이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켈시는 거의 인생을 걸 각오를 했다고 봐도 될 정도다. 그 놈의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얼간이로 만드는지! 하지만 켈시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들의 관계는 50년이 지나도 맥스 벨 듀이와 데이지 매슈스처럼 될 것 같지 않다. 콜튼은 절대 맨정신으로 켈시와 키스하거나 섹스하지 않는다. 주말엔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술을 들이붓고, 자연스레 분위기가 잡혔을 때도 기어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온다. 아침에 2층 침대가 비어있고 가방이 없으면 콜튼이 또 집을 나갔다는 뜻이다. 침대에서 혼자 멍청하게 알몸으로 일어났을 때 켈시는 욕을 중얼거린다.
날씨 좋은 가을날에 그런 멋진 아침을 맞이한 켈시 듀이는 시비 걸리는 일 없이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셔츠와 바지를 대충 챙겨입는다. 2인용 소파를 혼자 차지하고 앉은 채 손에 쥔 차 키의 요철을 엄지로 문질러본다. 그러고 있으면 머리가 냉정해진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 정비소에서 기름 냄새를 묻히는 동안 통장엔 돈이 꽤 모였다. 집 계약이 끝나면. 그리고 콜튼만 없으면, 켈시는 죽을 만큼 노력해서 마련한 중고 포드 차량을 타고 어디로든 가버릴 수 있다. 66번 국도가 문제가 아니라 온 미국을 누비고, 비행기 티켓을 살 돈이 모이면 캐나다, 멕시코, 러시아, 독일에 필리핀, 일본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쉬운 일이다. 조수석이 빈 포드에 차 키를 꽂고 돌려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아, 하지만. 그 순간 역시 울컥하는 마음에 켈시는 키를 꽉 쥔다. 씨발, 진짜 지랄 맞은 새끼. ‘당신 잘못이죠’? 이게 어떻게 내 잘못인데! 아니야? 진짜 나 때문이라고? 이런 씨… 켈시 듀이는 욕을 수백 가지는 삼킨 후 놀랍게도 콜튼한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내가 미안해. … 잘못했다고. ……. 아, 알아! 씨발, 아니까. 만나서 얘기하면 안 돼?” 먼저 그렇게 말해버리고 만다. 떠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그 좋은 날, 차 키는 다시 주머니 안쪽으로 숨어버린다. 결국 켈시 듀이는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날 절호의 찬스를 또 놓쳤다. 진짜 문제는 지구 어디를 가도 그의 동거인만큼 짜증나는 자식이 한 명 더 있진 않다는 사실이다. 그 녀석을 잃어버리면 켈시 듀이의 세상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생긴다.
그 날 밤 콜튼은 또 나갔던 횟수만큼 또 집으로 돌아온다. 밤 늦게 두 남자는 비좁은 소파에 어깨를 붙이고 구겨져 있다. 맥주에 심지어 위스키까지 마시고 말이다. TV 속 배우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콜튼은 그 사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질리지도 않고 떠든다. 사실 켈시는 그 녀석한테 이번에야말로 ‘너 진짜 날 좋아하긴 하냐?’라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떤 좆같은 대답이 돌아오든간에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을 재는 사이 콜튼은 예상보다 두 배 빠르게 취했고 이젠 아예 하품을 하고 있다. “아, 씨. 존나 졸리네.” 그러더니 콜튼은 켈시의 어깨를 붙잡고 키스를 한다. 술 냄새가 나는 입술은 거의 삼 초동안 떨어지지 않는다. 끝난 후에는 한 번 더 하품을 한다. “잘 자요.” 켈시의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린 콜튼이 그대로 비틀거리며 침실로 가버린다. 켈시는 잠깐동안 그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빈 캔과 유리잔을 다 정리하고 겨우 5분이 지나 켈시가 침실로 들어갔을 때, 콜튼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다. 파이프 사다리 위에 있는 자기 침대를 놔두고 켈시의 침대를 차지한 채 말이다. 또 이런 식이다. 켈시는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고 2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침대에 남은 좁은 틈에 몸을 구겨넣는다. 콜튼 데이빗이 주장하는 ‘아무것도 아니죠.’만 무시하면 대답은 뻔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면 켈시는 매번 이렇게 생각한다. 씨발. 네가 날 좋아해서!
3
신기한 일이지만, 누가 누굴 좋아하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듯 싸움은 벌어진다. 어제 저녁에도 시덥잖은 말싸움 끝에 콜튼은 집을 나갔다. 지금은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두절 상태다. 심각한 주제도 아니었고 사실 각자 바람 쐬는 시간을 가지는 중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켈시는 불안하다. 떨어졌다가 다시 붙어다니고, 세 시간만에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존나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이런 씨발, 이거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와 ‘끝나지만 않으면 돼, 제발.’ 사이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켈시는 영업시간이 주인 마음대로인 중국집이 문을 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좋아, 불은 켜져있다. 테이크아웃할 볶음국수가 하나가 될지 둘이 될지는 지금부터 결정된다. 켈시는 핸드폰을 꺼내든다. 어쨌든 관계의 모양이 잡히면서 켈시 듀이는 점차 확신한다. 둘 중 먼저 떠나는 건 켈시가 아니다. 그의 개자식은 언제든 켈시를 두고 또 집을 나가버리겠지만. 다만 하나 아직 젊은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끝나는 형태를 정하는 건 그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날 윌은 아주 피곤했다. 그래, 세상엔 켈시나 콜튼 말고 윌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는 선바이저에 가족사진을 끼워놓고 달리는 택시 운전사고, 사랑하는 딸은 병원에 입원해 보험 처리가 안되는 끔찍하게 비싼 치료를 받고 있다. 하루에 스물 다섯 시간을 근무로 꽉 채워도 돈이 턱없이 부족한데 윌의 심장은 자꾸 그에게 잠을 강요한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슬프고 조급하다. 그는 껌을 씹고, 박하사탕을 깨물어 먹고, 레드불과 커피를 마시고 운전대를 단단히 잡는다. 하지만 그래도 깜빡, 의식이 잠깐씩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사우스웨스트 29번가로 막 택시가 진입한 순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컴컴한 어둠 속에 빨려들어갔다가 퍼뜩 눈을 떴을 때 윌은 라이트에 하얗게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 남자의 놀란 얼굴을 본다. 윌은 즉시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돌린다. 하지만 쿵, 하고 무언가 치는 느낌이 차를 울리고, 싸늘한 공포를 느끼기도 전에, 차의 앞유리 너머가 콘크리트 벽으로 꽉 찬다. 택시는 지어진지 3년도 안 된 튼튼한 상가 건물을 들이받는다. 불쌍한 택시운전사는 콘크리트 벽과 운전석 사이에 찌부러져 즉사한다.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린다. 그 날 밤 29번가에서 두번째로 불운한 남자가 구급차에 실려간다. 남자 친구도 아닌 녀석한테 어제 여덟 번째로 차이고, 질리지도 않고 또 다시 문자를 보내고 있던 켈시 듀이다. 그의 엄지는 이제 자판을 보지 않고도 '미안해'를 정확히 쓸 수 있다. 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를 때까지 필요한 15초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의 심장은 아직 세상에 미련이 남은 것처럼 뛰고 있지만, 사흘 후에는 결국 완전히 숨이 끊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