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립 베이츠가 때때로 떠올리는 의문이 무색하게 콜튼은 완벽한 스트레이트다. 첫 여자친구를 사귄 건 열일곱 살.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이 매력적이지만 몸에 볼륨은 좀 부족한 여자애, 애나 오코너가 상대였다. 그녀를 침대에 거칠게 밀어눕혔을 때 느낀 짜릿함을 콜튼은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그걸 갖고 ‘빼기엔’ 시간이 좀 지났지만 말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말하건데, 현 직장의 몇없는 장점은 바로 여자들이다. 처음에 콜튼은 퀀텀 다이브가 여직원의 채용 조건에 외모를 포함시키는 회사인지 의심했다. 흰 가운 안쪽에 볼륨 있는 몸매가 도드라지는 치마를 입은 현실 안정화부의 책임이라든지. 새하얀 얼굴에 속눈썹이 긴 멍한 눈을 깜빡이는 청소부. 하다못해 생활 보조 안드로이드도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잔소리를 한다. 그래, 물론 ‘조’를 빼놓을 순 없다. 놀랄 만큼 매끄러운 금색 머리카락이 절제된 각도로 찰랑일 때, 촉촉한 입술이 완벽한 미국식 발음으로 m을 발음할 때 콜튼은 손끝에 입술 틈새의 부드러운 감촉을 상상한다.
요지는 간단하다. 그 중 한 명이라도 이런 순간에 콜튼을 위로해줄 여자친구가 되어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얘기다. 창백한 뺨을 매만지며 ‘콜튼, 너 안 좋아보여. 괜찮은 거 맞아?‘ 그렇게 물어봐주는 여자친구 말이다. 오후 3시 25분. 콜튼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의식은 꿈을 볼 만큼 잠들어있고 지끈거리는 두통을 질려할 만큼 깨어있다. 입사 이래 현실 안정성 수치는 꾸준히 하락 중이다. 악몽은 구체화되고 식은땀이 늘었으며 그만큼 사람이 간절해졌다. 홀로덱의 시뮬레이션만큼 선명한 꿈 속, 새로 발견된 방사성 물질은 기어이 지구를 휩쓰는 중이다. Grrrrrr… 좀비가 된 비-미국인들이 차폐막을 갉아먹는 소리가 생생하다. ‘덜컥.’ 문득 생소한 소리가 끼어든다. 꿈 속의 뭉개진 효과음보다 좀 더 선명하다. 힘겹게 콜튼이 눈을 뜬다. 다시 한 번 덜컥. 아니 정확히는 ‘덜컥덜컥덜컥덜컥.’ 소리의 근원은 다름 아닌 개인실 문이다. 문 밖에서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봐요, 옷은 고쳤어요?」
「…게이한테 말 걸어도 돼요?」
「뭐, 말 좀 한다고 옮겠어요.」
「……사람을 무슨 바이러스 취급하는 거, 너무한거 아니예요?」
「신기하네, 그보다 먼저 할 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난 게이가 아니에요.’라든지.」
검지와 중지로 쿼테이션 마크를 만드는 콜튼을 보고 레프의 눈이 불만스레 가늘어진다. 그 날 마침 커뮤니티 센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콜튼이 괴롭힘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커튼 삼은 레프의 눈은 늘 소심하게 사람들을 훔쳐보고, 그의 오른손은 지금도 콜튼의 멱살 대신 스스로의 왼팔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다. 언제든 꺼질 것 같이 떨리던 목소리가 분노에 힘입어 선명하게 입밖으로 나온다. 「…아니라고 하면 순순히 믿어주긴 할거예요? 그리고 게이면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당신한테 무슨 짓이라고 할까봐요? 무서워서 그래요?」 거기서 놀랍게도 레프는 한 걸음 더 용기를 낸다. 콜튼을 향해 한 발짝 내딛은 것이다. 마치 큰 키를 이용해 위협이라도 해보려는 것처럼. 기가 찬 콜튼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X, 이제 별 녀석들이 다 시비를 거네.」「…당신,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뭐라도 돼요? 그 ‘별 녀석’이랑 똑같은 신입사원이면서.」 그렇게 항의하는 레프는 아직도 가장 중요한 문제를 모른다. 콜튼은 그의 평탄한 삶을 위해서라도 친절히 알려주기로 한다. 「요점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레프. 이쪽이 잘난 게 아니라 그쪽이 만만한 거라고요. 겁쟁이, 음침하고, 말할 땐 횡설수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뭐, 덤으로 게이일 수도 있고?」 「…뭐… …지금 말 다했어요…?!」
꽉 쥔 레프의 주먹이 가볍게 떨린다. 하지만 그 주먹이 콜튼의 뺨이나 명치를 후려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콜튼은 웃는다. 이거 봐, 등신 같은 XX…. 보기보다 쉽게 울컥하는 주제에 남을 물어뜯을 용기는 없는 녀석. 여자의 좋은 점은 몸이 부드럽다는 점이고, 나쁜 점은 바로 그 몸을 함부로 다뤘다간 귀찮아지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주먹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건 마초적 커뮤니케이션의 좋은 점이다. 하지만 ’레프‘? 그 녀석은 좀 그렇지. 계집애 같잖아. 머리채라도 붙잡으면 방에 틀어박혀서 훌쩍거릴 것 같고, 딘메이나 그 근처의 털털한 여자애들이 찾아와서 ’왜 그랬어요?‘하고 대신 따져올 것 같은. 콜튼은 옛 여자친구와 그녀의 친구 무리를 떠올리며 진절머리를 낸다. 여자와 게이들은 왜 이러는지 그로선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덜걱이는 문 너머. 감염된 목에서 끌려나온 듯 거칠게 갈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별 같잖은 새끼 왔으니까 문좀 열어봐요. 아니면 문도 물어뜯는다?” 마치 레프처럼 들리는 목소리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한번이라도 이렇게 선명했던가? 콜튼은 자신이 아직 끔찍한 꿈 속에 있는지 가늠하며 덜걱이는 손잡이를 꽉 붙잡는다. “아… 또 깝치러 왔어요? 문을 뭐?” 쿵. 쿵. 덜컥. 몇 번 문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잠잠해진다. 빠른 포기. 레프다운 행동이다. 비웃음과 함께 콜튼이 손잡이를 놓은 바로 다음 순간 쾅 또는 '깡'이라고 표현할 법한, 딱딱한 것끼리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아연실색한 콜튼은 맥없이 열리는 방문과 나타난 레프를 본다. 레프가 억센 이로 물고있던 문 손잡이를 퉤 뱉는다ㅡ뭘 뱉는다고?ㅡ.
거기 서있는 건 콜튼이 아는 레프가 아니다. 미친 과학자한테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눈이 돌아있으니까. 몇 걸음 물러나면서 콜튼은 개인실을 살핀다. 아무리 그라도 침대 위에 철 파이프를 놓고 자진 않는다 (물론, 오늘 이후론 그럴 것이다). 휘청거리며 눈 앞까지 다가온 레프는 콜튼이 기억하는 인상보다 키가 크다. 떨리지 않는 오른손이 복수를 위해 멱살을 잡아올린다. 콜튼은 빠르게 저울질한다. 눈을 감거나 얼굴을 가리는 것보단 차라리 맞아버리는 게 남자답다. 뉴 커먼웰스에서 길러진 빈약한 상상력은 레프의 흐물한 주먹이 얼굴에 박히는 걸 예상했을 뿐이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말이 그 게이 같은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게이 새끼한테 뽀뽀 한번 받아봐. 꿈에 나오게.”
힘있는 이가 살을 뜯어낼 듯이 입술을 문다. 애나 오코너와 해본 수많은 입맞춤보다 거친 키스다. 까슬하게 마른 입술이 얼굴에 닿은 순간 콜튼의 사고가 정지한다─정확히 표현하자면 ‘이’가 닿았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이’는 ‘입술’ 안쪽에 있고…─. 좀비 아니면 개처럼 그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레프가 먼저 입을 닦는다. “왜, X같아요?” “…….” 콜튼은 ‘그러게. 진짜 X같네요.’라고 대답하지도 못했다. 맞은 건 확실히 주먹보다 훨씬 효과적인 한 방이다. “첫 남자 타이틀 너 줄게, 싸가지없는 자식아.” 레프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에는 어딘가 시원시원한 울림이 있다. 혼자 남은 콜튼이 자기 입술 위를 만져본다. 인중 아래쪽에 점점이 파인 잇자국이 손에 느껴졌다. 그제야 현실감과 함께 소름이 돋는다. 레프의 ‘첫 남자’가 됨으로써 콜튼이 자신의 숨겨진 소수자성에 눈뜨는 일은 없다. 그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몇 번이고 얼굴을 씻고 입을 헹군다….
쿵쿵 거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레프의 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꼿꼿했던 등도 자신없이 조금씩 둥글어지고. 창백한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그만큼 ‘물어뜯은’ 후에는 잇몸이 얼얼하다. 무고하지 않은 사람을 마음껏 물고 기물도 파손한 그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지만 동시에 개운함을 느낀다. 마치 한 번은 지나야했던 성인식의 관례처럼. 아직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레프는 가슴을 가볍게 부여잡고 주위를 조심스레 두리번거린다. 아무래도 한 잔의 안정화 티가 필요할 것 같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곳은 커뮤니티 센터다. 그 날 그 시각, 마침 같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은 없다. 둥근 의자를 끌어와 앉은 레프가 얌전히 안정화 티를 홀짝인다.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린 콜튼이 개인실을 박차고 나올 때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 “이, XX… 레프! 이 개자식, 죽여버릴 거야!” 분에 못이긴 콜튼이 뜯겨나간 개인실 문손잡이를 걷어차며 달려나가고, 주거구역의 단단한 벽에 쾅 부딪친 손잡이가 복도를 미끄러진다. 마침 그가 향하는 방향은 커뮤니티 센터 쪽이다. 로이 커티스, 체이스 라우터, 아드리안 터너, 메이 델린, 켈시 듀이…. 마찰이 있었던 사원이야 셀 수도 없다. 그 쟁쟁한 멤버들을 제치고 레프의 이름은 단숨에 맨위로 올라온다. 이제 콜튼 데이빗은 기꺼이 레프를 남자로 인정한다. 그게 그 게이 자식을 죽을 때까지 패도 되는 조건이라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