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아요….” 품 안에 안긴 에이가 자장가처럼 속삭인다. 깃털 같은 손길이 콜튼의 등을 쓸어내린다. 부드럽고 가벼운 것.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 남자들이 가장 다루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갈비뼈 틈새로 쑥 파고 들어와 허락없이 울음을 끄집어낸다. 얻어맞은 것처럼 뜨거운 머리를 모른 척 하기 위해 콜튼은 에이를 더 힘껏 끌어안는다. 사람이었다면 바로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만한 세기로. 하지만 에이는 불평하지 않는다. 쉽게 호감을 살 수 있게끔 디자인된 외피를 입은 안드로이드. 사원들의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기 위해 퀀텀 다이브가 준비한 AI. 이렇게 다뤄도 되는 존재. 콜튼이 갈라진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은 이럴 때 무슨 생각 해요?” 에이는 콜튼의 등을 한 번 더 쓸어준다. 안심시키려는 듯한 웃음기가 섞인, 다정하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콜튼 님이 괜찮아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 … “정말이에요.”
기계의 목소리가 조금만 더 공허하게, 더 차갑게, 프로그램의 연산 결과에 불과하다고 믿을 수 있을 만큼 무감하게 느껴졌다면. 그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개인실 벽이 어둡게 울렁인다. 환기 시스템이 가라앉은 공기를 무겁게 밖으로 밀어낸다. 콜튼이 에이를 안고 있던 팔을 푼다. 그러나 그녀를 놓아주는 대신 으스러뜨릴 것처럼 어깨를 쥔다. 반은 충동이었고 반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안드로이드에게 입력된 프로그램이 그를 밀어내기 전에, 콜튼은 힘을 실어 그녀를 침대 위로 밀어 눕힌다.
수치심을 견딜 수 없게 된 건 삶의 어느 순간이었을까? 어쩌면 콜튼 데이빗이 장애 하나 없이 백인 남성으로 태어난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물 둘쯤, 로버트 데이빗의 지위를 빌려 얻은 ID칩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일 수도 있다. 어쩌면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웃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한 순간일지도. 열네 살. 기술 수업의 팀 프로젝트를 망친 주범은 콜튼이었다. 조는 단체로 c-를 받았고 넷 중 두 명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나버렸다. 마지막까지 콜튼의 옆자리에 남아있던 게 그 애였다. 몸집이 아담하고, 늘 멋쩍고 어색하게 미소짓던 여자애. 사실 콜튼은 그 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 두 자리 앞의 동그란 뒷통수를 쳐다보기 위해 기술 수업이 있는 수요일을 기다렸다. 끌림을 자세히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냥 그 애라면 많은 게 괜찮을 것 같았다. …. 일부러 느린 동작으로 그 애가 가방을 챙긴다. ‘괜찮아, 콜튼. 난 재밌었어.’ 어설픈 미소와 얕게 울리는 목소리. 그 장면은 강렬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뇌리에 남는다. 미소를 꾸며낸 순간 그 애가 꺼내지 않고 참아낸 어떤 말이 있었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그 말이 콜튼을 어두운 동굴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는 더 이상 기술 시간을 기다리지 않게 됐다. 두 자리 앞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올까봐 수업 시간엔 책상에 엎드렸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점차 콜튼은 그 애뿐만 아니라, 그 애와 비슷한 사람들 역시 대하기 불편하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이 구는 사람들 말이다. 콜튼, 괜찮아. 그런 일들은 원래 일어나는 거야. 너무 당황할 것 없어. 이 순간이 지나면 천천히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흐른다. 콜튼 곁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남는다. 인내심이 짧고, 남들이 뭔가 해주길 바라고, 짜증을 내고, 탓하고. ‘왜 이런 일이 내 삶에 일어나는 거야?’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 그들은 콜튼을 참아주지 않고, 콜튼 역시 그들을 참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그 안엔 진정한 의미의 폭로도 수치심도 없다. 서서히 콜튼은 그 애를 잊어간다. 하지만 뇌는 이따금씩 수치스러운 기억을 콜튼 앞에 불쑥 들이밀곤 한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 참을성 있게 말하던 얼굴을 말이다. 하지만 콜튼도 이젠 충분히 자랐다. 지금이라면 그는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그 애의 옷깃을 콱 붙잡아 텅 빈 교실 한 켠으로 끌고 가서 벽에 밀어붙이면 된다. 어설픈 미소가 완전히 지워지고, 하얗게 질린 얼굴의 빈 자리를 겁먹은 표정이 채우게 만드는 거다. 그러면 마침내 콜튼은 그 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한 번 말해봐요.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침대를 누른 콜튼의 두 무릎 사이에 하얗고 마른 다리가 널브러져 있다. 개인실 침대에 눕혀진 에이. 그 장면은 진화된 기술에 동반되는 끔찍한 사건을 상징하는 것 같다. 콜튼의 그림자에 완전히 덮인 채 에이는 눈을 깜빡인다. “콜튼 님.” 이어지려는 말 사이에 호흡이 한 번 끼어든다. 우수한 성능의 안드로이드는 콜튼의 머리로는 계산할 수 없을 어떤 참신한 대답도 돌려줄 수 있다. ‘죄송하지만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라….’ 아니면 더 짧게 ‘안 돼요.’ 그것도 아니라면 다정하게 손을 끌어와 잡으면서 ‘현실 안정화부까지 안내해드릴게요.’ …. 콜튼은 어떤 가능성이라도 확정 되기 전에 에이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짓누른다. 창백한 어깨를 침대에 꽉 눌러붙인 채로. 이 에이가 스무 대 중 몇 번째 기체인지, 눈을 깜빡이는지 깜빡이지 않는지, 그런 것들이 정말로 중요한지조차 그는 모른다. 중요한 건 이런 사실들이다. 아랫 입술을 깨물면 살아있는 여자아이의 입술을 깨문 것과 비슷한 탄력이 느껴진다는 것. 틈을 비집어 열며 파고들면 에이의 숨이 새어나온다는 것. 콜튼은 생활 보조 안드로이드의 옷을 억지로 벗기고, 허벅지 안쪽으로 엄지를 미끄러뜨리는 상상을 한다. 더 멋대로, 더 폭력적으로, 더 한심하고 징그러운 방식으로. 많은 경우에 해결책처럼 느껴지는 건 그런 일들이다. 하지만 결국 콜튼의 손은 에이의 지퍼를 내리지 않는다. 그는 퀀텀 다이브의 기물을 파손할 만큼 담이 큰 녀석이 아니다. 호흡 한 번마다 떨리는 콜튼의 몸과 달리 에이의 몸은 고요하다. 귀를 기울이면 모터가, 정교한 기계장치가 동작하는 정확한 리듬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콜튼은 그러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드는 대신 에이의 어깨에 이마를 박는다.
“그 말이 진짜라면 끝까지 도와줘요.” 난장판이 된 개인실. 침대 위에 누운 예쁜 여자애. 콜튼은 그 다음을 원한다. 남자가 여자의 옷을 벗기는 건 단순한 과시가 아니다. 모든 행동의 동력은 필요다. 위로. 정복감. 쾌락. 살 냄새가 나는 따뜻한 피부. 누군가의 숨. 부드럽고 간지러운 것들. 그것들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싸구려 SF 소설 속 남자들은 안드로이드의 가슴에 고개를 묻곤 한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들은 정확히 콜튼처럼 말할 것이다. “X같이 외로우니까, 도와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