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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새 신입이 사고쳤어?

별 건 아니에요. 흔한 ⬛︎⬛︎⬛︎⬛︎ ⬛︎⬛︎⬛︎네요.

오차 발생 원인은.

음… 카드키 같은데.

그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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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 02:15

 전구, 락스, 대걸레, 손전등. 그래, 비상약품도. 그나마 좀 쳐준다면 통신기. 현장 운영부를 다 둘러본 콜튼이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다. '수확' 같은 거창한 말은 낄 자리도 없었다. 누가 자리를 비운 건지 텅 빈 데스크체어에 콜튼이 털썩 앉는다.

 “아… 됐어요. 그냥 자죠, 우리.” 늘어진 목소리에 지루함을 참으려는 의지는 없다. 콜튼 옆에는 마침 빈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직원들은 바빠보였고 건방진 신입 한 둘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난카는 앉지 않았다. “진심? 그러니까 더 가고 싶은데.” 심지어 졸려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딘가 아쉬워 보이기까지. “도킹 베이 어때. 뭐… 잔다면 좋고.” 전진하는 제안과 후진하는 목소리. 난카의 말은 심층 거주지 출신답게 둔하게 웅얼거린다. 피곤한 흐름이다. 콜튼은 쉬는 시간까지 수업을 연장하는 교사한테 책상 밑으로 엿을 날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솔직해지자면, 거절할 만큼 피곤하진 않았다. 회사는 참을성 있게 사원들을 타이르고 있었다. 지루함을 참으면 얻는 게 있다. 최소한 크레딧. 잘하면 그보다 더 멋진 것. 신대륙만큼은 아니어도 매력적인 보상 말이다. 하는 수 없이 콜튼은 몸을 일으킨다. 

 "오늘따라 또 왜 이렇게 쌩쌩해… 오늘 잠들면 영영 안 일어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내가 봐주는 거야. 끝나자마자 잘 거니까." 두 사람은 현장 운영부를 벗어나 도킹 베이로 향한다. [“인식적 ⬛︎⬛︎⬛︎⬛︎ 발생 지점은 여기 같네요.”] 스테이션 외곽 링 그 가장 바깥쪽. 우주와 맞닿은 경계 지점. 걷는 동안 난카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콜튼보다 좀 더 오래 어둠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선엔 겁이 배어있고, 곧 미끄러지듯 새로운 시설들을 향해 도망친다. 다행히 공포 옆엔 눈부신 발견이 있다. 함선 격납고. 훌륭한 울림이다. 난카의 눈이 다시 희미하게 빛난다. “이런 곳부터 봐야지.” 잿빛 손가락이 개폐 버튼을 누른다. 육중한 셔터가 열리지만. 기대와 달리 안은 넓기만 할 뿐 텅 비어있다. 눈으로 읽을 만한 건 겨우 일정표 정도. “‘이런 곳부터’의 기준이 뭐예요? 제일 끔찍하고 잠오는 곳?” 콜튼이 비아냥거리자 난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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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엔 콜튼의 차례다. 그가 문을 연 엔지니어링 데크는 사정이 좀 낫다. 반듯한 기계 장치와 모니터. 조종 레버와 수많은 버튼들. 사내아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물론─유진 서머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머리를 분실한’ 사람이 아닌 이상─막 입사한 현장운영부 신입이 건드려도 될 만한 장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개척자를 꿈꾸는 미국인은 눈에 띄는 아무 버튼을 꾹 누르고, 지하 동굴에서 풀려난 또다른 용감한 영혼은 그걸 말리지 않는다. 콜튼이 조작한 건 아무래도 진단 장치 같았다. 뭘 진단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삐삐삐. 분석 완료를 알리는 요란한 알람과 함꼐 모니터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화면에 나타난 글자를 읽기 위해 콜튼이 눈가를 찌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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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 존재함, 해결책: 존재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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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카가 콜튼의 왼쪽 팔뚝을 쿡쿡 찌른다. 뭔가 이상하다는 신호였다. '왜요,' 되묻기도 전에, 나노 초의 오차도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콜튼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 카드키.”] 원리를 설명할 수 없는 데자뷰나 영감처럼 우주적인 감각이다. 카드키를 쥔 감각도, 현장 운영부와 도킹 베이 사이를 가로막은 셔터를 통과한 기억도 없었다. 난카가 한 번 더 어깨를 쿡 찔렀다. 이번에 콜튼은 짜증을 느꼈고 ‘나도 안다고요!’ 그렇게 말하기 위해 왼쪽을 본다. 

 “왜?” 오른쪽에서 난카가 의아한 어조로 묻는다. 그 순간 누군가 콜튼의 왼쪽 어깨를 콱 잡고 세게 돌린다. 빙그르르. 마치 회전 의자처럼 그의 몸이 돌아가고… 

 

 

 

 

 

 아니, 돌아간 건 실제로도 의자였다. 현장 운영부의 데스크체어가 겨우 반바퀴를 빙그르 돌아가다 멈춘다. 마약중독자처럼 늘어져 있던 콜튼이 간신히 눈을 뜬다. 옆자리에는 난카가 앉아 있다. 그들 앞에는 따뜻한 김이 솟아오르는 차 두 잔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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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튼, 내 생각에 자는 게 좋겠어.” 난카의 말은 또렷하고 양자역학의 농간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콜튼은 그가 건방지다고 생각한다. 딱히 이유는 없어도, 맞는 말을 맞는 타이밍에 하는 사람들에겐 늘 그렇게 느꼈다. 지독한 멀미 속에서 콜튼은 대답 대신 옛 미국의 욕을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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